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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공파의 실질적 조상 휘 겸 선조의 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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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진 작성일20-01-04 08:55 조회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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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공파의 실질적 조상 諱 謙 선조의 決行

 

  휘 겸 선조는 경력공의 玄孫(손자의 손자)으로서 연산조때 宣傳官을 지내셨다. 선전관은 武官職으로 정3품부터 정9품까지 품계가 다양했는데 휘 겸 선조께서 몇 품이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1504)에 연루되어 사림파인 임사홍일파에 의해 함경북도 鏡城으로 流配되었다. 그 후 중종반정(1506)으로 훈구파가 다시 집권하자 훈구파였던 휘 겸 선조도 복권되었다. 귀양살이 기간은 3년여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보기 드문 역사가 전개되었다. 통상적으로 귀양이 풀리면 원래의 자리로 복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휘 겸 선조께서는 반대로 모든 일가를 데리고 유배지인 함경북도 경성에 정착하여 살았다. 이러한 결행에서 휘 겸 선조의 偉大性이 엿보인다.

 

  위대하신 휘 겸 선조께서는 왜 이러한 결행을 하셨을까? 추측해 보면 몇 가지 이유를 찾아 낼 수 있다.

 

  첫째 역사 기록을 보면 甲子士禍로 죽거나 귀양 간 사람은 총 239명 인데 3족을 멸하는 연좌제의 관행으로 볼 때 실제로는 천 명을 훨씬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휘 겸 선조 본인은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을 얻어 공직생활을 한 것 뿐인데 훈구파로 몰려 정쟁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에 정치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복권이 되어 중앙 정계에 나아가면 또 다시 정쟁에 휘말릴 것을 예측하신 것 같다. 실제로 휘 겸 선조의 예상은 적중해서 중종때 己卯士禍로 수많은 선비가 죽고 다쳤다.

 

  둘째 유배 당시 함경북도 경성은 세종께서 설치하신 46진중 6진 지역과 접한 지역으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귀양지였다. 하지만 경성은 동해안에 임해 있어서 생각보다 춥지 않았고 평야지역도 상당히 넓어서 농사를 짓기에 충분했다. 살기 좋은 곳이었다. 조선시대 벼슬아치는 녹봉을 받았는데 귀양간 사람이 복권이 되면 억울한 귀양살이에 대한 보상으로 상당한 祿俸을 주는 관행에 비추어 아마도 조정에서 경성지역의 상당한 땅을 휘 겸 선조의 일가에게 부여한 것 같다. 넓은 토지를 받은 휘 겸 선조는 一家의 번성을 위해서 함경북도 경성에서 새 출발을 결심한 것이다.

 

   현재 경력공파의 宗員은 거의 모두 휘 겸 선조의 子孫이다. 현재 경력공파 후손은 함경도 경성군, 명천군, 성진시에 약 5만 명이 世居하고 있다. 휘 겸 선조의 진취적인 先見之明決行이 지금의 경력공 후손을 창조 한 것이다. 위대한 인물 한 명의 미래를 내다본 決定으로 수 십만명의 자손들이 한반도에 세거하게 되었다.

 

                                                                                                                    松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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